식품 알레르기 표시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2026년 들어 석 달도 안 돼 알레르기 미표시 식품 회수가 3건이나 터졌다. 편의점에서 아무렇지 않게 집어든 초코 과자에, 마트에서 장바구니에 넣은 조미료에, 건강 챙긴다고 산 효소식품에까지.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이 사건들을 쭉 모아서 시간순으로 놓고 보니까, 하나의 흐름이 보였다. 어떤 일이 있었고,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팩트만 모았다. 판단은 읽는 사람의 몫이다.
식품 알레르기 표시가 없었던 카레, 9살 아이가 쓰러졌다
2013년 4월, 인천의 한 초등학교.
점심시간에 카레가 나왔다.
9살 A군은 그걸 먹었다.
카레처럼 보였지만, 성분의 30% 이상이 우유였다.
A군에게는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었다.
입 주변이 가렵고, 귀가 부어올랐다.
식사를 중단했지만 이미 늦었다.
운동장에서 놀다가 쓰러졌고, 뇌사 상태에 빠졌다.
이후 A군은 끝내 사망했다.
(연합뉴스 2013.4.9 / 매경헬스 2020.6.16)
법원은 제때 조치를 취하지 못한 교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대한급식신문 2015.1.22)
이 사건 이후에도 학교 현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식품 알레르기 표시 대신, 학교가 내민 건 목숨 각서였다
2016년, 서울의 한 공립 초등학교.
호두 반 알만 먹어도 호흡곤란이 오는 아이가 있었다.
아나필락시스 진단을 받은 1학년 배 군.
엄마는 학교에 알렸다.
아이의 병명도, 어떤 음식이 위험한지도 전부 설명했다.
학교의 대응은 이랬다.
아이가 사망해도 학교는 책임이 없다는 확인서에 서명하라.
이른바 목숨 각서.
(경향신문 2016.7.4 / YTN 2016.7.4)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다.
그해 국정감사에서도 문제가 됐다.
당시 데이터가 공개됐다.
5년간 식품 내 알레르기 유발성분 표시위반 적발은 24건.
실제 회수 조치는 단 1건.
(메디컬월드뉴스 2017.10.18)
적발돼도 회수가 안 되는 구조.
그 사이, 아이들은 계속 먹고 있었다.
식품 알레르기 표시 없는 제품, 10년간 환자 3.6배 폭증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 기준으로, 음식으로 인한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진료받은 0세에서 9세 어린이 환자 수가 나왔다.
2011년에 85명.
2020년에 433명.
5배 증가.
10세에서 19세까지 합치면, 170명에서 616명으로. 3.6배.
(경향신문 2021.10.5)
원인의 84.8%는 식품이었다.
계란, 우유, 호두, 밀, 땅콩 순서.
(질병관리청 아나필락시스 조사연구 보고서)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 CISS에 접수된 식품 알레르기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2013년 316건에서 2016년 599건. 5년간 총 2,159건.
매년 증가 추세.
만 10세 미만이 전체의 25.7%.
(메디컬월드뉴스 2017.10.18)
경기도 교육청 자료에서는 초중고 학생의 식품 알레르기 증상 비율이 2015년 3.08%에서 2018년 4.2%로 올라갔다.
(국민권익위원회 2019.1.7)
식품 알레르기 표시 누락, 2026년에도 반복되고 있다
2026년. 올해다.
2월 4일, 요리의 정수 훈연멸치맛이라는 제품. 새우를 사용했으면서 표시 안 함. 6만 개 넘게 유통.
(푸드아이콘 2026.2.4 / 식약처 보도자료 2026.2.4)
3월 6일, 이마트24에서 팔던 크리스타초코뿅. 밀이 들었는데 표시 없음. 2,351kg 생산, 2만8,667개 유통.
(조선비즈 2026.3.6 / ZDNet 2026.3.7)
3월 13일, 효소식품에서도 알레르기 유발물질 미표시 적발.
(식약처 보도자료 2026.3.13)
석 달 만에 3번.
조미료, 초코 과자, 건강식품.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위반 시 과태료는 1차 100만 원, 2차 200만 원, 3차 300만 원이다.
(식품저널 2017.2.20)
깨알 글씨의 함정
표시가 되어 있다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카제인나트륨이 우유 성분이라는 걸, 마트에서 장 보는 사람이 바로 알 수 있을까.
난백분말이 계란이라는 걸, 아이 과자를 고르는 엄마가 즉시 파악할 수 있을까.
국내 알레르기 유발식품 표시제 현황을 분석한 논문에서도 같은 지적이 나왔다. 성분명이 전문 용어로 되어 있어 소비자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한천식알레르기학회지 2019)
포장지 뒷면 글씨 크기도 문제다. 동아일보는 2013년에 이미 영양성분표시가 너무 작아 돋보기를 사용해야만 확인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2013.1.25)
정부도 이 문제를 인식해, 2019년 1월부터 식품 표시 글씨를 10포인트 이상으로 의무화했다.
(식품음료신문 2018.11.19)
그런데 매장 조명 아래서, 비닐 포장에 반사되는 글씨를 장바구니에 넣기 전 한 글자 한 글자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미국은 이미 법으로 움직였다
2025년 10월 13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ADDE Act, SB 68에 서명했다.
미국 최초로, 식당 메뉴에 9대 알레르기 유발물질 표시를 법으로 의무화한 것이다.
2026년 7월 1일 시행.
20개 이상 매장을 운영하는 외식업체가 대상.
우유, 계란, 생선, 조개류, 견과류, 땅콩, 밀, 참깨, 대두.
(미주중앙일보 2025.10.15 / CBS8 2026.1.1)
2026년 2월에는 3개 주가 추가로 같은 법안을 발의했다.
(Allergic Living 2026.2.18)
한국은 어떤가.
가공식품 22종에 대한 표시 의무는 있다.
하지만 일반 음식점은 아직 자율 표시 권장 수준이다.
(국민권익위원회 2019.1.7)
2018년에는 음식점 알레르기 유발물질 표시 의무화를 추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Daum뉴스 2018.6.19)
현재까지 일반 음식점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의무화 법안은 시행되지 않은 상태다.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바코드 하나로 알레르기 성분을 걸러주는 앱들이 쏟아지고 있다.
SafeEat이라는 앱은 라벨과 바코드와 메뉴를 스캔하면 개인 알레르기 프로필과 대조해 위험 성분을 표시한다.
(safeeat.app)
Bokha라는 앱은 바코드 스캔 1초 만에 알레르기를 확인해준다.
(App Store)
국내 학술 연구에서도 OCR 기술과 바코드 인식을 활용한 식품 알레르기 관리 앱이 설계된 바 있다.
(KoreaScience 2024)
기술은 있다.
바코드 찍으면 이 제품에 우유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경고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쓰는 마트 앱에는 이 기능이 없다.
이 흐름이 향하는 곳
이 사건들을 쭉 이어서 놓고 보니까, 한 가지가 보였다.
소아 청소년 아나필락시스 환자는 10년간 3.6배 늘었고, 지금도 늘고 있다.
알레르기 미표시 식품은 2026년 올해에도 계속 유통되고 있다. 석 달 만에 3건.
성분표의 전문 용어와 작은 글씨는, 현실적으로 소비자가 즉시 판단하기 어려운 구조다.
미국은 식당 메뉴 알레르기 표시를 법으로 만들었다. 한국 일반 음식점은 아직 자율이다.
바코드 스캔으로 알레르기를 걸러주는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현재 한국의 주요 마트 앱이나 결제 시스템에 내 알레르기 성분 자동 경고 기능은 도입되어 있지 않다.
이 여섯 가지 사실 사이의 빈 공간.
그 공간에 누군가의 아이가 있고, 누군가의 장바구니가 있다.
이걸 발견하고 나니까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이 빈 공간을 가장 먼저 채우는 쪽이, 엄마들의 지갑을 여는 쪽이 된다는 것.
그게 마트 앱이든, 스타트업이든, 정부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마트에서 과자 뒷면을 뒤집어보고 있다.
깨알 같은 글씨를 읽다가 포기하고, 그냥 카트에 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