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X 화장품은 군 장병과 그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싸고 좋은 화장품”의 대명사였다. 전역 선물, 휴가 선물로 사랑받던 그 신뢰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연예인 이름을 앞세운 허위 광고, 가격을 속인 할인율 조작, 해외 브랜드로 위장한 국적 세탁까지. 이 글은 PX 화장품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흐름을 따라간다.
PX 화장품의 시작점: ‘90% 할인’의 비밀이 터지다
이야기는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X에서 팔리는 화장품 중에는 “시중가 19만 원, PX가 7,600원”처럼 90% 이상 할인을 내세운 제품들이 즐비했다. 군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퍼졌다. “PX에서 사면 10분의 1 가격이다.” 그런데 그 할인율에는 비밀이 있었다.
업체들이 시중 판매가 자체를 터무니없이 높게 설정한 것이다. 실제로는 그 가격에 팔린 적이 거의 없는 제품의 정가를 부풀려 놓고, “96% 할인”이라는 숫자로 소비자를 유혹했다. 이른바 ‘할인율 뻥튀기’. 2021년 처음 보도된 이 문제는 (한국일보, 2021.9.22)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고 반복됐다.
PX 화장품 인기템 ‘달팽이 크림’, 퇴출 그리고 복귀
PX 화장품 하면 빠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닥터지 블랙 스네일 크림, 일명 ‘달팽이 크림’이다.
전역 선물 1순위. 여자친구 선물 필수템. 그런데 2023년 1월, 이 제품이 PX에서 사라졌다. 국군복지단과의 납품 계약이 해지된 것이다. (한국경제, 2023.1.9) 표면적인 이유는 “자진해약”이었지만, 배경에는 할인율 뻥튀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매일경제TV, 2023.1.10)
그런데 약 1년 뒤인 2024년, 비슷한 이름의 제품이 다시 등장했다. ‘로얄 블랙 스네일 크림’. 업체 측은 “성분이 다른 별개 제품”이라 했지만, 소비자 사이에서는 “달팽이 크림이 이름만 바꿔 돌아왔다”는 반응이 나왔다. (스포츠한국, 2024.1.16)
PX 화장품 업체 5곳, 4년간 2,857억 원을 벌다
2025년 9월, 오마이뉴스의 탐사보도가 나왔다. (오마이뉴스, 2025.9.17)
문제가 된 PX 화장품 업체 5곳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약 2,857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업체들은 2022년 가격 조사에서 시장가격 교란 혐의로 위약금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같은 해 말, 다시 조사가 시작되자 “자진해약”이라는 방식으로 계약을 종료했다.
내부 고발자는 말했다. “징계와 고발이 필요한 수준이었는데, 복지단이 자진해약으로 정리하자고 했다.” 국군복지단은 “당시 실무자가 남아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사실상 방관이었다.
‘뒷광고’에서 ‘허위 광고’로: 소비자 기만의 진화
시간을 조금 되돌리자. 2020년, 한국 인터넷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유튜버 뒷광고 논란이다.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의 ‘내돈내산’ 콘텐츠가 실은 광고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많은 유튜버들이 줄줄이 사과했다. (나무위키 – 2020년 유튜버 뒷광고 사건)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가 가이드라인을 강화했고, “광고”라는 표시가 의무화됐다.
그런데 5년이 지난 2025년, 수법은 더 교묘해졌다. 단순히 광고를 숨기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가짜 브랜드를 만들고, 가짜 방송을 제작하고, 연예인에게 거짓 대본을 주는 단계로 진화한 것이다.
PX 화장품 신뢰를 이용한 ‘미라클 시드니’ 사건
2025년 8월 4일. 유튜브 고발 채널 사망여우TV가 영상 하나를 올렸다. 제목은 도발적이었다. “제가 모를 줄 알았나요?” (사망여우TV, 2025.8.4)
타깃은 **‘미라클 시드니’**라는 화장품 브랜드. “호주에서 유명한 글로벌 주름 크림”으로 홍보되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입소문이 퍼졌고, 백화점에도 입점했다. 그런데 사망여우TV가 파헤친 실체는 충격적이었다.
호주 법인의 지분 100%는 한국 기업 ‘메이크보그’ 소유였다. 아마존 호주에 등록은 돼 있었지만 리뷰는 0건. 패키지에는 한글이 인쇄돼 있었다. 호주에서 유명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만 수법은 정교했다. SBS ‘나는 솔로’를 모방한 **‘나는 리턴싱글’**이라는 가짜 콘텐츠를 만들었다. 피부과 전문가처럼 보이는 배우를 투입했다. 실제 방송 출연자의 이름과 사진을 무단 도용했다.
가수 바다, 개그우먼 정주리: “대본대로 말했을 뿐”
이 사건에서 가장 주목받은 이름은 **가수 바다(S.E.S.)**였다.
바다는 한 뷰티 유튜브 채널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주에 갔을 때 이 제품을 처음 봤거든요. 유명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발언 전체가 외부 제작사가 작성한 대본이었다.

논란이 터지자 바다는 자필 사과문을 공개했다.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혼란을 드린 점 깊이 반성한다.” 소속사 웨이브나인은 해당 채널과의 협업을 종료하고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경제, 2025.8.21)
개그우먼 정주리도 같은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했다. 정주리는 8일 사과문을 올렸다. “저를 믿고 제품을 구매해주신 분들이 계시다는 걸 알기에 책임이 막중하다.” (매일경제, 2025.8.9)
**‘나는 솔로’ 16기 옥순(이나라)**은 상황이 달랐다. 광고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사진과 이름이 도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옥순은 해당 업체를 정식 고소했다. “이름을 걸고 끝까지 강경 대응하겠다.” (스타투데이, 2025.8.6)
메이크보그의 정체: 상습범이었다
미라클 시드니의 배후로 지목된 메이크보그. 이 회사의 이력을 추적하면 패턴이 보인다.
2025년 초, 메이크보그는 **‘칸세츠’**라는 관절 영양제를 판매했다. “일본의 유명 의약품”이라고 광고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에서 만든 일반 식품이었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조사를 받았고, 한국 식약처도 수사에 나섰다. (나무위키 – 칸세츠 관절약 사기 광고 사건)
그 전에는 **‘톡스웰’**이라는 다이어트 식품을 팔았다. “초강력 체지방 감소, 혈당 관리”라고 광고했지만 일반 과채가공품이었다. 2024년 1월부터 1년간 255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2025년 8월 20일, 식약처는 메이크보그 대표 한준영(당시 30세)을 식품표시광고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일본 의약품으로 둔갑한 관절약. 이탈리아 원료를 내세운 다이어트 식품. 그리고 호주 브랜드로 위장한 화장품. 나라만 바뀌었을 뿐, 수법은 동일했다. “해외에서 유명하다”는 거짓말로 신뢰를 만들고, 연예인과 전문가를 동원해 그 신뢰를 팔았다.
백화점도 속았다: 입점 논란과 긴급 철수
미라클 시드니는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아백화점 등 국내 주요 백화점 11곳에 입점한 것처럼 홍보됐다. 백화점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비자에게는 “검증된 제품”이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사실 확인 결과, 이것은 정식 입점 계약이 아닌 벤더사를 통한 위탁 판매였다. 논란이 불거지자 백화점 3사는 즉각 제품을 철수했다. (지디넷코리아, 2025.8.8) (뉴스웨이, 2025.8.8)
백화점이 직접 속았는지, 아니면 검증을 소홀히 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소비자의 신뢰는 이미 깨졌다.
현재 상황에서 읽히는 것들
지금까지의 흐름을 정리하면 뚜렷한 구조가 보인다.
첫째, PX 화장품 시장의 가격 구조 자체가 오랫동안 왜곡되어 왔다. 할인율 뻥튀기는 2021년에 보도됐고, 2025년에도 여전히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국군복지단의 관리 감독이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둘째, ‘해외 유명 브랜드’라는 포장은 소비자를 속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메이크보그는 일본, 이탈리아, 호주를 차례로 전면에 내세웠다. 나라만 바꿔가며 같은 수법을 반복했고, 매번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셋째, 연예인은 이 구조에서 ‘신뢰의 매개체’로 소비되고 있다. 바다와 정주리는 대본을 받아 읽었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추천했으니까” 산 것이다. 대본 여부와 관계없이, 연예인의 이름이 허위 광고의 핵심 도구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다.
넷째, 메이크보그 대표는 검찰에 송치됐지만, 회사는 수차례 주소지를 이전하며 단속을 피해왔다. 부산 동구에서 해운대구로, 서울 강남구로, 다시 해운대구로. 식약처 송치 직전에 또 주소를 옮겼다. 255억 원을 벌어들인 기업에 대한 제재가 영업정지와 과태료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현행 제도의 한계를 보여준다.
다섯째, 이 사건은 단일 사건이 아니다. 2020년 뒷광고 논란 이후 강화된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기만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광고라고 표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아예 가짜 브랜드·가짜 방송·가짜 전문가를 만들어 소비자를 속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규제가 한 발 느리면, 수법은 두 발 앞서간다.
PX 화장품이라는 신뢰, 연예인이라는 신뢰, 백화점이라는 신뢰. 소비자가 믿을 수 있는 신호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누가, 어떻게 이 신뢰를 다시 세울 것인가.